Life

여름이 담긴 운동화...

한아이 2013. 4. 16. 01:12

 

 

 

 그날 밤 늦게 부모와 함께 쇼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글러스는 가게 진열장에 놓인 그 테니스화를 보았다.  얼른 눈길을 돌렸지만  그의  두발목은 누구에게 잡히기라도 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를 가운데 두고 말없이 걷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뒷걸음 치면서 한밤중의 진열장에 외롭게 놓여 있는 테니스화를 바라보았다.

 때가  6월이어서  거리에 내리는 여름처럼 조용히 놓여 있는 그 멋진 운동화를 살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셈에었다. 대지는 생생한 기운으로 충만되고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6월.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부터 쏟아져 들어 오기라도 하듯 풀들이 보도을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더글러스는 이딱딱한 시멘트 위에 발에 묶인채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아빠!"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진열장 뒤에 있는 저 운동화...'

 아버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새 운동화가 필요한 이유를 말해 보렴" 하고 말했다.

 " 네..."

그것은 그 운동화를 보았을 때 매년 여름 처음으로 신을 벗고 풀밭을 달릴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더글러스가 말했다. "설명하기 어려워요."

 어쩌면 테니스화를 만든 사람들은 소년들이 바라는게 뭐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랑마랑한 젤리와 용수철을  바닥에 넣고 나머지 부분에 벌판에서  빛이  바랜 풀을 뜯어 넣었다. 부드러운  운동화의 깊숙한  부분 어딘가에는  수사슴의 근육이 감춰져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운동화를 만든 사람들은 나무를 뒤흔드는 바람과  호수로 흘러가는  개울을 수없이 보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운동화 속에 몽땅 들어있는것, 그것은 바로 여름이었다.

 더글라스는 이 것을 말로 표현 보려고 애썼다.

 " 그래?" 아버지가 말했다. " 하지만 작년에 신던 운동화가 어때서?'

 더글러슨 발에서 겨울을 떨어버리는 것,  눈과 비로 쪄든 가죽 신발을 벗어 버리고 새 테니스화의 끈을 매는 기분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 운동화에는 항상 나무와 강과 집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해줄 것암 같은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모르시겠어요?' 더글러스는 되물었다. "그저 작년의 운동화를 그대로 신을 수 없을 뿐예요."

 작년에 신던 운동화는 속이 죽어 있었다. 처음 신기 시작했을 때는 휼륭했지만 여름이 다 지날 물렵이면 늘상 나무와 개울,  집을 뛰어넘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면 그 운동화는 죽어버리고 마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해가 바뀌었으니  이번 여름에  이 새 운동화를 신으면 그는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집을 향해고  계단을 올라갔다.  " 저축을 하렴.'  아빠가 말했다 " 5-6주일쯤 모으면 말이다...."

"여름이 다 가고 말거예요!"

 불이 꺼졌다. 더글러스는 무거운 신발을 벗어버린 채  달빛이  비치는 침대 끝에 놓여 잇는 자기의 발, 겨울의 큼직한  잔해들이 떨어져나간 발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찾아내는거야. 운동화를 사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내야 해.'

 다 아는거지만 , 마을 주위의 산에서는  소 떼를 못 살게 굴면서 해빛을 쬐는 친구들이 더 많은 햇빛을  받으려고 달력을 뜯어버리듯 옷을 벗어 내던지느라 법석이다. 그 친구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여우처럼 날렵하게 달려야 한다. 저금통을 들어올려 보았지만 짤그랑거리는 소리만 약하게 들릴 뿐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 혼자힘으로이루어야 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하류쪽을 향해 흘러 가는 강물과 같은 그 바람을 자기의 발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꿈결에 그는 토끼 한마리가 녹색이 가득한  풀밭을 쉬지 않고 내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늙은 샌더슨씨는 마치 장난감가게 주인처럼 신발가게 안을 살피고 다녔다. 그는 두 손으로 신발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신발은 고양이 같고 또 어떤것은  강아지같이 여겨졌다. 그는 신발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매만지고 끈을 바로잡거나 혀를  제대로 배놓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휘 돌아보았다.

 더글러스가 그곳에 서서 자기의 가죽구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움켜쥔  손에 들어있는  돈만을 바라보면서, 저금통을 털어  꺼낸 그동전들을  괴로운 듯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카운터 위에 쌓아 놓았다.

"아무 말도 말아라-." 샌더슨씨가 말했다. 더글러스는 얼어 붙었다.

 "네가  뭘 사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어!" 샌더슨씨는 말했다. "매일 오후마다 우리 가게 진열장 앞에  서 있는 널 보았지. 이 테니스화를 갖고 싶은거야, 그것도 외상으로 말야."

"아니에요!" 더글러슨는 마치 밤새도록 꿈 속에서 달음박질이라도 한것처럼  숨을 물아쉬며 소리쳤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샌더슨할아버지 ,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제 부탁 한가지를 들어주셰요.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운동화를 신어 보신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고 계세요?"

 샌더슨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이십년이나 삼십년 전쯤 될까. 왜 그래?"

 "할아버지, 테니스화를 파시려면 최소한  그걸 직접 신어 보는 게 고객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요? 그래야 그 느낌이  어떤지 아실거 아네요? 과자가게 주인은  자기가 만든 과자를 맛보건든요, 그러니까...."

"너도 보았을 텐데." 노인이 말했다.

" 나도 신발을 신고 있잖니?"

"하지만 그건 운동화가 아니잖아요! 운동화를 선전하지 않고 어떻게 그걸 팔려고 그러세요? 또 운동화를 모르면서 어떻게 운동화를 선전할 수 있겠어요?'

 샌더슨씨는 한 손을 턱에 대고 약간 뒤로 물러섰다. "그래.."

 일 분쯤 후 그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큰 발에 테니스화를 신었다.  작업복의 검은 아랫단 밑에 드러난 운동화는 어울리지 않고 낯설어 보였다. 샌더슨씨가 일어섰다.

"느낌이 어떠세요?" 소년이 물었다.

"느낌이 어떠냐고? 좋다."

"할아버지 , 이제 제가  이야기를 마저 말씀드리는 동안 앞뒤로 좀 흔들어 보시고 약간 뛰어 보시겠어요? 제 이야기는요 , 이 돈을 드릴테니 운동화를 제게 주세요. 그럼 제가  빛을 지기는 하지만 , 제가 그 운동화를 신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세요,할아버지?"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휙, 획! 전 할아버지네 가게의 짐꾸러미를 날라드리고 ,  물건을 들여오고 할아버지께 커피를 갖다 드릴께요. 그리고, 이가게의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 우체국 심부름도 할거예요! 제몸이 열 두 개나 되는 듯 쉬지 않고 드나드는 걸 보실거예요.  할아버지. 그 운동화를 신은 느낌이 어떤가 보세요. 그 운동화가 얼마나 빨리 저를 나를 것인지 상상이 되세요?  안에 있는 이 용수철들은요?  그걸 신고 달리는 기분이 어떨 것 같으세요? 귀찮아하시는  일들을  제가 얼마나 빨리 해치울 것인지 짐작이 가세요? 할아버지는 제가 온 마을을 누비고 다니는 동안 시원하게 가게에 앉아 계시기만 하면 돼요!"

 샌더슨씨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말에 어리둥절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운동화 속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해서 발가락을 꿈지락거려 보고 발다닥을 둥글게 꼬부려 보기도 하며 발목을 움직여 보았다. 앞위로 부드럽게 흔들어 보기도 했다. 그의 얼굴에 마치 오색의 조명이 명멸하듯 온갖 감정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소년의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 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보면 서 있었다. 소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었고 노인의 얼굴에는 계시같은 게 나타나 있었다.

"애야," 마침내 노인이 말했다. "오년쯤 뒤에 너도 신발가게를 하면 어떻겠니?"

"고맙습니다 , 할아버지 . 하지만 전 아직 제가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너라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을게다." 노인이 말했다.

"틀림없고 말고 . 아무도 널 막지는 못할거다."

노인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상자를 벽처럼  쌓아둔 곳으로 가서 소년에 줄 운동화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소년이 운동화끈을 매고 있는 동안 심부름 시킬 일을 적었다.

 노인은 무언가 적은 쪽지를 내밀었다. " 오늘 오후 네가 해야 할 일이  열두어 가지 된다. 그 일을 다 하고  나면 우리들 사에 빛은 없어지고 넌 해고야."

"고맙습니다 샌더슨 할아버지!" 더글러스는 쏜살처럼 뛰어나갔다.

" 잠깐!" 노인이  소리쳤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샌더슨씨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래, 기분이 어떠냐?" 하고 물었다.

 그는 강물과 밀밭 속에, 그리고 벌써 그를 마을 바까으로 달려나가게 만드는  바람  결에 파묻혀버린 자기 두발을 내려다 보았다.

"어때, 영양이  된 것 같니? 아니면 사슴?" 노인이 물었다.

머뭇거리던 소년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디. 그는 한바퀴 빙글 돌고 나서 뛰어나갔다. 문께가 텅 빈 듯하더 테니스화 소리가 더운 열기 속으로 멀어져 갔다.

 샌더슨씨는 햇볕이 따가운 문간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아득히 먼 옛날로부터 그 소리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아름다운 동물들이 넓은 벌판에서 뛰어 놀다 덤불을 해치고 나무 밑을 지나 달아나 가버린 뒤에 남던 아련한 메아리였다.

"영양이나 사슴이 된 기분겠지."

하고 샌더슨씨는 중얼거렸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소년이 버리고 간 겨울 구두를 집어들었다. 오래 전부터  비에 젖고 질척거리던, 눈이 묻어 묵직해진 신발이었다.

 타는 듯안 햇볕을 피해 나온 그는 부드럽고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걸어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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