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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를 꿰뚫은 카라코람 하이웨이...

한아이 2013. 3. 25. 11:47

 

 

파키스탄의 북부지방을 노호하며 흐르는 인더스강.

이 강 위로 300m나 치솟은  절벽에선 남자들이 마치 인형처럼 로프에 매달린채 바위에다 폭약을 창치하기 위하 남폿구멍을 힘들여 뜷고 있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바위가 천공기 끝에 갈려 구멍이 생기자 그들은 남포를  놓아 폭파시키기 위해 이조그마한 틈새에 화약을 끼웠다.한번은 폭발때문에 바위사태가 일어나 23명의  도로 건설자들이 밑에 흐르는 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조금  북쪽의 황량한 어떤지대에서는 몸힐바빙하가 뻗어 나가면서 20m이 두께로암석과 진흙이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완공된 도로의 한 구간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새로 건설된 50m 길이의  다리가 헌자강 속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런 재난에 익숙해진 도로 건설자들은 임시 교량을 세우고 작업나갔다.

 남쪽 빠딴지방 부근에서는 지진으로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나 공로와 20개의 마을을 덮쳐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가? "아무도 모릅니다." 한 구조원의 말이다. "돌더미가 너무도 엄청나서 사람들을 찾아 낼수조차 없었으니까요."

 이와 같은  죽음, 절망, 그리고 엄청난 고난은 현재 파키스탄과 중국을 연결하고 있으며 도로 건설 기술의 경이라고 불러 마땅한 전 771km카라코람하이웨이(kkh)의 모든 구간에 점철되었다.

 1958년 부터 시작해 20년 간 파키스탄 육군은 세계에서 가장 험하고 길을 내기가 어렵다는 지형을 뜷고  이 공로의 건설을  추진해 나갔다. 이중 10년 동안은 중국이 가담하긴했지만 사실상 그 업적은 파키스탄에  돌리는게 마땅하다. 농업이나 공업, 또는(지금까지는) 광물자원의 혜택이, 부족한 파키스탄은 창의력과 지도력,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무엇인가 해낼수 있다는 것을 제3세계의 여러국가들에게 보여주었던것이다.

 

 

 간단한 연장과 현지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갖고 파키스탄인들은 이 엄청난  장애물들을 극복했다. 파키스탄의 꼬히스딴지역 저지대의 kkh구간에서 여름기온이 48도끼지 치솟아 도로건설자들의 등은 살갗이 익을 정도로 탔다 도로가 고지대에 이르면 세계 최대의  산맥들인  히말라야, 카라코롬 및 힌두쿠시  사이를 뚫고 오른다. 겨울이 되면 영하29도로 떨어지는데다가 바람이 시속 150키로 이상으로 휘몰아치는  4500미터 이상의 이 고도에서는 도로 건설자들이  벼랑 꼭대기에서 저 밑계곡  속으로 빨려들듯 바람에 날려 떨어지기도 했다. 406명의 파키스탄인 및 중국인들이 도로 건설중에 목숨을 잃었고 314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관리들은 말한다. 매1키로마다 거의 1영 골로 희생자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비공식 통제에 의하면 2000여명이나  되는 파키스탄들과 500명의 중국인들이 이 도로를 내기 위해 목숨을 바쳣다고한다. 사실이야 어떻든 군인들과 노동자들의 희생은 전장에서 바친 목숨이나 마찬가지로 자기네 국가의 안전을 위한 이바지였다. 중국과 파키스탄에 있어 kkh는 전략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이기 때문이다.

 이새로 건설된 도로로 인해 신쨩성의 카스카르로부터 바다에 이르는 중국의 육로가 최소한 2000키로나 단축된다. 신쨩서에서 상해까지 육로로 5400키로미터이던것이  지금은 파키스탄의 카라치항까지 약 3200키로미터로 단축된것이다. 한편 이도로로 파키스탄은 스리랑카보다 더 넓게 분포된 풍부한 광산지대를 자기나라의 경제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지역에는 운모.구리,철광석, 및 납을 비롯해서 루비, 에머랄드, 사파이어와 석류석,등이 매장된것으로 확인되었다.

 kkh가 굽이 도는 계곡과 고개들은 역사적으로 풍요와 함께 군대의 행렬을 지켜봤다. 기원전 4세기에는 이곳을 통해서 알렉산더대왕이 인도를  침공했다. 한대(202 b.c-202ad)로 부터 시작하여 1000여년동안 중국의 대상이 비단과 차, 도자기를 가지고 그 유명한  비단길의 일부인 이곳을 지나 인도, 소아시아,  및 유럽으로 부터 나온 금,상아,보석,향료,등과 물물교환을 했다. 오늘날 이공로는 5개국-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중국, 인도, 그리고 19키로미터에 달하는 아프카니스탄  영내의 도로를 지나 소련의 국경이 맞닿는 지점과 근접해 있다.

 kkh의 건설을 계획한 공로는 파키스탄 최초의 군부 독재자였던 아유브 칸원수에게있다. 분단된 캐시미르지방의 파키스탄지역에 대한 인도의 위협을 우려한 아유브는 인구가 희박하고 취약한 북부지역 전천후 도로를 건설하는것이  국가안정에 긴요하다고 믿었다.

 50년대 중반 아유브는 당시 악천후로 일년 중 9개월은 봉쇄되던 북부지역 행정도시 길기뜨와 현재 파키스탄의 일부로 편입된  스와뜨공국의 까로라 마을사이를 잇는 도로 건설에 착수할것 육군 공병대에 명령했다. 400키로에 달하는 이 첫구간은 후에 애브떠바드읍으로 연결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수도 이스라마바드까지는 기존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120키로만 달리면 쉽게 닿을수 있는 가까운거리이다.

 파키스탄의 육군의 정예인 개척사업단(fwo)에 소속된 도로건설대 병사들은 앞에 가로놓인 난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없었던, 오히려 다행스스런 무지에 대해 지금도 의아해하고있다. 장교들은 교육시키며 한 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이나 지질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읍니다.지도를 보면 대체로 텅 빈 공간으로 되어 있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것 뿐입니다."

  이 게획에 자원하고 나선 한 젋은 장교가 굴람 스프다르 바뜨 소령이었다.1958년 8월 그는 최초의 지형조사대 일원으로 스와뜨지방의 오지에 들어갔다. 수세기 동안 이지역은 고산부족 범법자들의 도피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야지스딴인이라고 불리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무두질하지 않은 양가죽을 발에 싸매 신고 중세이전의 누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납게 생긴 원주민들이 길를 가로 막을 때마다 굴람일행은 소금과 담배를 선물로 주었다.

 적대행위도  자주 빚어졌다. 원주민들은 새로 건설되는 공로가 얼마 안되는  그들의 농경지를  덮어 버리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측량표지들을 없애 버리고  전화선을 훔쳐 야을 붙들어 매는 밧줄로 쓰거나 동물의 덫을 만드는가 하면 폭약창고를 털기도 했다. 야지스딴인들이  도로에 깔 돌어미-그리고 때로  그들 자신까지-를  폭파해 버리는 소리가 산간의 밤 정적을 께뜨리고 했다.

 이계획에는 현지의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사람들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다소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파키스탄 육군은 고산 부족민들에게 차,설탕,등유,옷 등을 주어 새로운 생활용품과 욕구을 채워줌으로써 그들을  작업장으로 끌어내고자 힘썼다.  얼마 안 있어 도로변의 찻집과 남쪽에서 올라온 희한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들로해서 고산부족 사람들을  도로 건설 작업으로 끌어 들이게 되었다.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차 맛을 들이게되자 우리는 일을 해야만 차를 얻을수 있다고 말했지요." 조그만 보건진료소가 개설되고 군의관들은 말라리아와 안질 및 폐질환으로 고생하는 이지역의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일할  의욕을 증진시키기 위해 군에서는 원주민 여인들에게 구슬목걸이나 거울, 기탄 장신구들을 제공함으로서 남자들을 작업에 끌어들이는데 부인들의 간접적인 도움을 얻었다.

 원주민들의 미개한 생활배경은 그밖에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산간 부락민들에게는 평지가 일종의 호사에 속한다. 저녁에 작업이 끝나면 가족들이 도로로 모려 나와 잠을 잤다. 어두워진 뒤에 자동차를 몰기란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짐승들을 도로 밖으로 내몰고, 투덜거리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깨워야 했기 때문에 트럭 한대를 호송하는데 몇 시간씩이나 걸렸다. 이 도로의 건설로 해서 생기는 헤택을 원주민 모두에게  설득시키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독립심이 강한 꼬히스딴족츹 토지보상금에  대해 불만을 품고는  1977년 5월 무기를 들고 나타나 2500명의 파키스탄인과 중국인 도로 건설자들을 포위헸다. 파키스탄 육군은 그들을 실력으로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지세와 보급, 재정등 복합적인 문제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공로를  완성 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가끔 의심을  품기도 했다. 도로건설자들은  당나귀들이 보급품을  실어나르고  사람들이 걸어서 다닐 수 있게 자갈투성이의 가파른 비탈에 통로를 내야 했다. 바위를 뚫는 압착 천공기가 망가지자 일꾼들이  부서진  부품들을  등에 지고 작업 지휘소로 옮겨 놓았는데 80명이 압착기 하나를 12키로 옮기는데만도 이틀이나 걸렸다. 사람과 장비는 로프를 통해 깍아지른 듯한 바위 위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해외에서 주문한 보급품이 건설현장에  도착하자면 1년씩이나 걸렸다.  폭약을 구입할 자금이 모자라 때로는  못 쓰게 폭탄이나  지뢰에서 꺼낸 화약을 사용해야 하기도 했다.

 fwo의 노련한 공병대령인 이야즈 딘 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이과업을 터무니없이 과소 평가했지요.  예를 들어 까밀라-빠딴 지역에서는 우리가 투입한 작업반들이 1년에 20여키로 밖엔 건설할 수없었습니다. 2년내에 320키로의 도로를 완성해야만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작업반을 4배로 늘렸고, 인력이 충분할 때까지 다시 이를 2배 , 또 그2배로 증가시켰습니다."

 어떤 때는 도로 건설자들의 사기가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 떨어졌다. 길기뜨 남방 299키로 지점의  또르까미를에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  면을 다라  도로를 내야 했다. 인부들의 머리 위로는 1200미터의 봉우리가 까마득하게 솟아있고  발 아래애는 인더스강의 희뿌연  물줄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때로는 한번의 폭발로 3키로에 걸쳐 낙석이 생기는 수도 있었다. 사망자수가 늘어나자 원주민 중의 한사람이 굴람에게 "당신이 여기를 통과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이 도로를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고 우리도 믿소"하고 말했다. 거의 1년이 지난 뒤 13명의  목숨을 잃은 끝에 마침내 또를까마르는 뚫렸다.

 1962년 굴람은 지프를 타고  새로 완공된 구간에서 최초의  시험운행을 했다. 그가 또르까마르 너머의 한마을에서 차를 멈췄을때 이제까지는 절대로 자동차에 접근하지 않던 남자 몇명이  물 한 주전자를 가져다가 차앞바퀴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그중의 한사람이  굴람에게 말했다" 참험한 산이죠 . 이짐승도 먼길을 왔으니 물을 마셔야 할거요."

  파키스탄은  그들의 도로망을 해발 4600미터 고원인 꾼제람령서

 

 

중국의 도로망과 연결시킬 계획이었다. 1967년 중국이  꾼제람으로 부터 할레구시에 이르는 험난하 157키로  구간의 공사에 착수했다.처음에는 중국의 참여가 엄격한 비밀에 붙여졌다. 1976년 , 당시 파키스탄 수상이던 줄피카르  알이 부토가 빠딴  북방 16키로지점에서 발생한 산 사태로 25명의 작업인부들이  사망한 데 대해 북경 당국에 위로의 뜻을 전달한 뒤에야 비로소  중공의 참여 사실이 공개되었다.

 당시에 9500명의 중국 노동자들 - 일부 비공식 통계는 그 인원이 4만명을  웃돌았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이 kkh 건설에  투입되고 있었는데 중공과  파키스탄의 홍보관계자들은 kkh를 '우정의 하이웨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교량들은 중국측에서 건설햇는데 그중에는 사원에 흔히 잇는 사자상이 적당한 크기로 새겨져 있는 것들이 많다. 1978년, kkh의 공식적인 개통식이 중국이 건설한 꼬뜨교 위에서 열렸다. fwo를 대표하여 당시 fwo단장이 된 육군 공병대의 굴람소장이 참석했다.

 

 

 이제 kkh는 보다 대담한 여행자에게는 각별한 여행 경험을 갖게 해준다.

 

세계최대의 산맥속으로 근800키로 달릴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으며 눈이 녹아 내린 수정 같은 물줄기 옆에 앉아 보거나. 키가 크고 콧수염을  기른 데다 가슴에 탄약대를 두른 채 구식 소총을 매고 다니는 원주민들 사이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또 달리  어느곳에서 진정한 개척자들의 의기 양양한  기분- 그리고 어느정도의 위험까지도 -을 느껴 볼  수 있겠는가?  산사태ㅘ 분류의 범람으로  여행자들은 끓임없이 위험과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개발동상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kkh는 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미는  헌자 마을 바로 남쪽의 도로변에 세워진  기념비 문면속에 감동적으로 담겨져있다. 육군 공병단이 세워  목숨을 잃은  도로 건설자들에게 바쳐진 

 

 이 기념비의 꼭대기는 기술자들의 천공기를 본뜬  첨탑 모양으로 되어 있다. 여기엔 파키스탄인의  시인이자 철학인 모함마드 이끄발이 지은  다음과 같은 두 줄의 글귀가 우르두어(파키스탄의 공용어=편집자주)로 새겨져 있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산이라도 가루로 만들 수 있는것.'

 

#1981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2월호 실린글입니다

오랜 시간전 이글을 읽었를 때....한번은 꼭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길입니다..

.자전거로....

그후에 읽은 글중에  카라코람하이훼이도로가 자전거여행자들의 로망이라는 글을 읽고서는....

 

가보고 싶은데

길을 떠난다는것은

늘 흔들림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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